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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6일 새벽기도 낭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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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사랑 작성일17-02-05 21:47 조회5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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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6일 새벽기도 본문

제 12 장 박해자에서 제자로*[본 장은 사도행전 9:1-18에 의거함]
복음 선포에 따른 성공으로 매우 자극을 받았던 유대 지도자들 중에서 특출한 이는 다소 사람 사울이었다. 사울은 로마 시민으로 태어났으나, 혈통으로는 유대인이었고, 예루살렘의 가장 유명한 랍비들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빌 3:5, 6). 랍비들은 사울을 크게 유망한 청년으로 간주하였고, 그가 유능하고 열심이 있는 고대 신앙의 옹호자라는 큰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으로 등용되어 권세 있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울은 스데반을 심문하고 판결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하나님께서 그 순교자와 함께 하시는 뚜렷한 증거를 보고 사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반대하는데 있어서 그가 신봉했던 그 사업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의 마음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는 당황하여 그가 그들의 지혜와 판단을 온전히 신임했던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울은 스데반이 신성 모독자요, 순교한 제자가 전파한 그리스도는 협잡꾼이므로 거룩한 직분을 가지고 봉사하는 자신들이 틀림없이 옳다는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주장을 수긍하였다.
사울이 큰 고민 없이 이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그가 받은 교육과 편견, 옛 스승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인기를 얻으려는 그의 교만으로 그는 양심의 소리와 하나님의 은혜를 배반하였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확실히 옳다고 결정하고 나자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이 가르친 교리에 대하여 매우 가혹한 반대자가 되었다. 거룩한 남녀들을 재판정으로 끌어다가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투옥도 하고, 심지어 사형에 처하게 선고한 사울의 활동으로, 새로이 조직된 교회는 슬픔과 침울에 잠기게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도망하게 되었다.
이 핍박으로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이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행 8:4)하였다. 그들이 간 도시들 가운데 다메섹이 있었는데, 새로운 신앙으로 많은 개심자를 얻었다.
제사장들과 관원들은 방심치 않는 노력과 가혹한 박해를 함으로 이단이 진압되기를 바랐다. 이제 그들은 새로운 가르침에 대하여 예루살렘에서 취했던 단호한 조치를 다른 곳에서도 도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다메섹에서 하기를 바랐던 그 특별한 일을, 사울이 돕겠다고 제안하였다.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쫓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이와 같이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행 26:12)은 다소 사람 사울은 건장한 힘과 활력, 그리고 그릇된 열심으로 불타올라 그의 삶의 전 방향을 전환시킨 그 특별한 사건이 일어난 잊지 못할 여행길에 올랐다.
그 여행의 마지막 날 “정오”에 피곤한 여행자들은 다메섹 가까이 이르러 인근 산에서 흘러 내리는 시원한 시냇물로 물을 댄 비옥한 땅과 아름다운 전원과 과실이 풍부한 과수원들이 다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황량한 황무지를 오랫동안 여행한 후라 이와 같은 광경은 참으로 상쾌하였다. 사울이 그의 일행들과 함께 아래에 있는 비옥한 평야와 아름다운 성읍을 경탄하면서 바라보고 있을 때에, “홀연히”, 너무나 현란하여 인간의 눈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행 26:13)었다고 그는 후일에 말하였다. 눈이 멀어 당황한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다.
그 빛이 계속 그들을 둘러 비추고 있는 동안, 사울이 들으니 한 “소리”가 들려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26:14, 15).
공포에 사로잡히고 강렬한 빛으로 거의 눈이 먼 사울의 동료들은 어떤 음성은 들었으나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울은 들은 말을 깨달았으며, 그에게 말씀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이 그에게 분명하게 나타났다. 사울은 그의 앞에 서신 영광스러운 분에게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그분을 보았다. 그 상처받은 유대인의 영혼 위에 구주의 얼굴 모습이 영원히 인각되었다. 그분의 말씀은 놀라운 힘으로 그의 마음을 찔렀다. 그의 어두운 마음 구석에 큰 빛이 비쳐 들어와 과거 생애의 무지와 과오, 그리고 현재 성령의 교화하심의 필요를 깨닫게 하였다.
이제 사울은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함으로 실은 사단의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의와 의무에 대해 가졌던 그의 확신은 모두 제사장들과 관원들에 대한 맹신에 크게 기초되었음을 알았다. 그들이 부활의 이야기는 제자들이 교묘히 날조한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을 때에 사울은 그들의 말을 믿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금 친히 나타나 서 계셨으므로 사울은 제자들의 주장이 진실함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늘의 빛이 비추이고 있는 그 시간, 사울의 마음은 놀랍도록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성경의 예언을 깨달았다. 그는 유대인들에 의한 예수의 거절, 그의 십자가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선지자들이 이미 예언하였고, 그분이 약속된 메시야임을 증명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울의 마음에는 순교할 때의 스데반의 설교가 힘있게 떠올랐으며, 순교자가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하였을 때, 순교자는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음을 깨달았다(행 7:56, 55). 제사장들은 이 말을 신성 모독이라고 선언하셨으나, 이제 사울은 그 말이 사실임을 알았다.


시편 제 29 편 [다윗의 시]
1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3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뇌성을 발하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 여호와의 소리가 힘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6 그 나무를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
7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하시도다
9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10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11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


사도행전 제 9 장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쫓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시편 제 29 편  화잇주석

2 주의 전에 대한 숭경심―모든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기도와 찬미의 조석 제사로써 하나님께서 존귀히 여김을 받으셔야 한다. 어린이들은 기도 시간을 존중히 여기고 숭경하도록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기도와 공중 예배를 드리는 시간과 장소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므로 거룩한 곳으로 여기도록 어린이들을 교육시켜야 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태도와 행동에 나타날 때에 그런 마음을 일으키는 감정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자녀 538).
하나님의 집―하나님의 특별한 임재를 보이신 장소를 어떻게 여길 것인가에 대하여 기록된 성경 말씀을 배우고 숙고하고 또 자주 반복하는 것은 노소를 물론하고 유익한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하셨다.
야곱은 천사들에 대한 꿈을 보고서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6, 17).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0:20).
많은 사람들이…영원한 사물의 신성성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거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집에서 행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근신함과 숭경심을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이를 명령해야 한다(자녀 539).
증가하여 가는 부주의를 경계하라―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 만나시는 장소를 어떻게 여겨야 할 것인가를 지상의 성소가 가지고 있던 신성성을 보고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관한 사람들의 습성과 관습에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좋은 방면으로 변화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욱 나쁜 방면으로 변화하였다. 우리를 하나님에게 연결시키는 귀중하고 신성한 사물은 우리의 심령에서 급속히 사라지고 통속적인 수준에까지 저락되고 있다. 옛날에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신성한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소에 나갈 때에 가졌던 숭경심은 대개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은 당신을 섬기는 의식을 주셔서 세속적인 어떤 것보다도 이 의식을 가장 높이신다.
하나님의 집은 자주 모독을 당하며 안식일은 안식일을 지키는 백성의 자녀들로 말미암아 더럽혀진다. 어떤 경우에는 성도들이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려야 할 바로 그 회합에서 아이들이 성전 주위를 뛰어다니고, 장난하고, 지꺼리고, 그들의 악한 성질을 나타내도록 용납을 받는다. 그리하여 거룩하여야 하고, 거룩한 고요가 지배하여야 하며, 완전한 질서, 우아, 겸손이 있어야 할 장소가 완전한 바벨론 곧 혼란이 되고 만다. 이것은 하나님의 불쾌하심을 초래해서 당신의 임재하심이 우리 회중에서 떠나게 하는데 충분하다(자녀 541).
자녀를 부모들과 함께 머무르게 하라―하나님의 성소에서 경배하는 자들의 도덕적 감성은 향상되고 고결하고 성결하게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문제가 한심하게도 등한히 여김을 받아왔다. 이 문제의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기 때문에 그 결과 혼란과 불경이 만연하게 되었으며 하나님은 수치를 당하셨다. 교회내의 지도자들, 곧 목사들과 교사들,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높은 견해를 가지지 아니하였거든 하물며 경험없는 어린이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마땅히 돌보아야 할 부모들로부터 떠나서 떼를 지어 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면전에 있으며, 당신의 눈이 그들을 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경박하고 경솔하며 소근거리고 웃으며 부주의하고 불경스럽고 산만하다(자녀 542).
경건하고 조용할 것―설교하는 동안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하나님의 집과 예배에 대한 불경건한 태도를 나타내서는 안 된다. 이와같은 좋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만일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를 바라보며 그러한 행동을 주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면 틀림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염오(厭惡)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깊이 듣는 사람을 원하신다. 원수가 가라지를 뿌린 것은 사람들이 자고 있는 때였다(자녀 543).

시편 제 29 편 SDA 성경주석

서론. 시 29편은 뇌우(雷雨)의 노래, 곧 일곱 우레의 노래로 불려 오고 있다. 이 시는 히브리의 모든 천연계 시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이 히브리 시인은 단순히 천연계의 모습을 단순한 언어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언제나 천연계에서 창조주의 능력과 영광을 본다(하나님의 이름인 야훼[Yahweh]가 이 시에 18회 등장한다). 이 시는 폭풍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 절정을 이루고 마침내 사그러질 때까지의 광경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이 시는 구조적으로 정교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이 같은 균형이 그 서론(1, 2절)과, “여호와의 소리”라는 구절을 7번 반복하면서 기술한 폭풍에 대한 묘사(3~9절)와, 그 결론(10, 11절)에 나타난다. 이 시는 언어를 통한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 묘사이다.
이 시는 강풍과 우레와 번개를 동반한 바다 건너편에서 시작된 성난 폭풍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 폭풍은 지중해에서 들어와서 동쪽 사막에 이르러 그 세력이 소멸될 때까지 레바논 산지와 동레바논(Anti-Lebanon) 산지를 휩쓸고 지나간다. 우리는 우가릿 문헌(참조 68, 69쪽)에서 이 시와 상세한 부분까지 흡사한 수많은 작품들을 발견할 수 있다. 1절과 2절의 “돌리다”, 4절과 5절의 “소리”, 그리고 7~9절의 “소리”로 연결된 삼중콜론(tricolon, 동일한 단어가 3번 반복해서 사용되어 한 단위를 이루는 형식-역자 주)이 그 실례들이다. 우가릿 문헌은 또한 여러 가지 불명료한 점들까지도 해결해 주었다(참조 6, 8절 주석).
전승에 따르면 이 시는 초막절 마지막 날에 제2성전에서 불렸다. 오늘날에는 이 시가 오순절 첫날에 드려지는 회당 예배의 한 부분이 되어 있으며 또한 안식일 예전(禮典)에도 포함되어 있다.
 표제에 대해서는 67, 78, 79쪽을 참조하라.

1. 권능 있는 자들. 히브리어 브네 엘림(bene ’elim). 이 단어는 그 해석이 명확치 않다. 「70인역」에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천사들을 의미하는 말일 것이다(참조 욥 1:6 주석). 시 86:6의 유사 구절(시편에서 유일하게 이 구절이 쓰인 경우)이 이 사상을 지지하는 듯이 보인다.
영광. 시인은 하나님이 영광과 능력의 하나님임을 인정한다. “영광”이라는 단어는 9절에서 이 시의 정점(頂點)으로 쓰였다(참조 시 68:34).
2. 거룩한 옷. (「제임스왕역」에는 “the beauty of holiness”[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문자적으로 “거룩하게 꾸밈.” 이 구절은 시 96:9에 다시 나온다. 영혼을 단장하는 것은 몸에 의복을 차려 입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거룩한 품성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외적 아름다움과도 비교될 수 없다(참조 벧전 3:3, 4). 만일 “권능 있는 자들”이 천사들을 의미한다면(참조 시 29:1 주석) 시인은 서론에서 천사들에게 이제 막 묘사하고자 하는 뇌우(雷雨) 중에 그 권능을 나타내는 그를 찬양하도록 요구함으로 우리를 땅에서부터 하늘로 이끌어 올리는 것이다.
3. 여호와의 소리. 언어로 표현된 3~9절의 교향곡에서 시인은 지중해로부터 몰려와서 돌연히 레바논에 휘몰아치다가 마침내는 사막을 따뜻하고 평온하게 만들면서 동쪽으로 사라져 버리는 뇌우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묘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에게 우레는 “여호와의 소리”이다(참조 18:13). 이 구절은 3~9절에 일곱 번 등장한다.
영광의 하나님. “영광의 왕”(시 24:7~10)이라는 표현과 비교하라. “영광”이라는 단어가 시 29:1~3에서 세 번 반복된다.
많은 물. 즉 “큰 물.”
4. 힘 있음이여. 문자적으로 “힘을 가지고.” 시인은 폭풍 중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몇 가지 속성을 알아차린다.
위엄차도다. 문자적으로 “위엄 중에.” 우레가 땅을 살펴보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5.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그 폭풍은 백향목으로 유명한 레바논의 산지를 급습하여 강풍으로 그 튼튼한 나무들을 꺾어 버린다. 또한 번개도 상당수의 위엄 있는 백향목들을 산산이 부숨으로 파괴의 대열에 동참한다.
6. 그 나무. (「제임스왕역」에는 “them”[그것들]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에서는 이 대명사가 엠(-em)이라는 형태의 동사어미로 되어 있다. 이 어형은 실제로는 고대 문법 형태(전접어[前接語, enclitic, 강세가 없어서 앞에 있는 단어와 한 단어처럼 읽히는 단어 또는 요소-역자 주]) 중 하나로 AD 7세기부터 모음 없는 본문에 발음을 첨가하기 시작한 유대 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었다. 우가릿어(참조 68, 69쪽)는 엠이라는 어미(語尾)가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임을 보여 준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가 레바논을 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며 시룐을 들송아지같이 뛰게 하시도다”(「개정표준역」)라고 번역되어야만 한다. 이는 폭풍의 영향으로 마치 뛰는 것처럼 보이는 레바논 산지와 시룐 산지 자체를 의미한다.
송아지같이 뛰게 하심이여. 참조 시 68:16; 114:4.
시룐. 헤로몬산에 대한 시돈식 이름. 이 산은 그 정상이 해발 약 2,813.9미터인 동레바논(Anti-Lebanon)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참조 신 3:9 주석).
들송아지. (「제임스왕역」에는 “young unicorn”[어린 일각수]로 되어 있음-역자 주). “들송아지”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참조 시 22:21 주석).
7. 가르시도다. 문자적으로 “자르다”, “잘라 내다.” 이 절은 뱀의 모양 같은 지그재그형의 강렬한 번개 섬광들을 묘사한다.
8. 가데스 광야. 우가릿어 본문들이 발견되기 전에는 이 구절이 폭풍이 북쪽의 레바논으로부터 브엘세바에서 서남쪽으로 약 7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참조 민 20:16) 남쪽 변경의 가데스까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지나가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여겼다. 가데스는 히브리인들이 정탐꾼들을 가나안으로 들여보낸 곳(민 13:17~20)인 가데스바네아와 동일한 곳으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불평의 말들을 한 것으로 인해 그곳에서 광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민 14). 하지만 우가릿어 분문들(참조 68, 69쪽)에 대한 연구 결과로 “가데스 광야”라는 용어가 시리아 사막에 대한 명칭임을 알게 되었다(참조 3절 주석).
9. 암사슴으로 낙태케 하시고. 뇌우(雷雨)가 야기한 공포 때문임이 분명하다. 몇몇의 아라비아 시인들과 더불어서 플루타르크(Plu-tarch)와 플리니우스(Pliny)도 이 같은 현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암사슴” 대신에 “상수리나무”를 쓴 「개정표준역」의 번역은 대구법상 더 잘 어울리는 번역이다. 하지만 히브리어 아이얄로트(’ayyalot, 「제임스왕역」의 “암사슴”)를 “상수리나무”를 의미하는 아일(’ayil)의 복수형으로 간주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통상적으로는 엘림(’elim)이 아일(’ayil)의 복수형으로 쓰인다(참조 사 1:29).
말갛게 벗기시니. (「제임스왕역」에는 “dis-cover”[밝히다]로 되어 있음-역자 주). 히브리어 하사프(h.asap), “벗기다”, “벌거벗게 하다.”
그 전. 아마도 여기서는 성막이 아닌 천연계를 일컫는 듯하다.
모든 것. (「제임스왕역」에는 “every one”[모든 사람]으로 되어 있음-역자 주) 곧 “모든 것.” 우레, 번개, 나무들이 부딪치는 소리, 광야의 흔들림, 나무들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잎들 등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선포한다. “땅은 수천 가지의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한다”(Coleridge). 참조 시 19:2. 경외하는 마음으로 강력한 자연 현상들을 바라본 후 위엄과 능력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향상시키는 것은 우리에게 유용한 일이다. 전 우주적인 찬양의 합창은 우리에게 이사야의 이상 속에 나타나 있는 스랍 천사들의 끊임없는 경배를 생각나게 한다(참조 사 6:2, 3). 이 절에서의 절정적 묘사와 더불어 폭풍은 가라앉고, 이제 시인은 조용한 명상으로 또한 하나님의 통치권과 그분의 놀라운 평화의 선물에 대한 선포로 방향을 전환한다.
10. 홍수.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노아 홍수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폭풍우에 대한 묘사가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보고 이 홍수를 폭풍에 동반된 또한 그 결과로 나타난 큰 비로 여기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듯이 보인다.
영영토록 왕으로. 하나님은 폭풍 속에 계셨던 것처럼 지금 폭풍이 지나간 후에도 절대 주권자로서 영원히 통치할 것이다. 폭풍으로 인한 동요와 놀람 후에는 영혼에 평온함과 확신을 가져다주는 최종적 선언이 발해진다.
11. 힘. 폭풍 가운데 그처럼 두드러진 능력을 보여 주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풍성하게 후원할 수 있다(참조 사 40:29~31).
평강. 하늘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은혜로운 선물(참조 시 85:8, 10; 요 14:27; 빌 4:7; 살전 5:23). 그 어떤 언어에서도 이보다 더 감미로운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처칠(Churchill)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밖에서는 전쟁의 폭풍이 불어대고 땅들이 그 질풍의 분노로 몰아침을 당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마음속에는…평화가 있다.” 이렇게 해서 귀가 찢어질 정도까지 크레셴도되었던 시 29편의 교향곡은 가장 부드러운 피아니시모로 그 끝을 맺는다(Soncino, 시편 주석). 평강의 왕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21, 26)라고 말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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