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7일 새벽기도 낭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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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사랑 작성일17-02-06 22:54 조회1,713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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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7일 새벽기도 본문
제 12 장 박해자에서 제자로*[본 장은 사도행전 9:1-18에 의거함]
이 모든 것은 박해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계시였던가! 이제 사울은 약속된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로서 이 땅에 오셨으며, 그분은 자신이 구원하려 했던 사람들에게서 거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는 또한 구주께서 무덤에서 의기 양양하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도 알았다. 거룩한 계시가 임한 그 순간, 사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를 증거한 스데반이 그의 동의로 희생되었고, 그 후 그로 인해 다른 많은 훌륭한 예수의 제자들이 잔인한 박해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것을 두려움으로 기억하였다.
구주께서는 스데반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셨고 그의 명료한 논리를 논박할 수가 없었다. 그 유식한 유대인은 순교자의 얼굴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반사되어 마치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행 6:15)은 것을 보았다. 사울은 원수들에 대한 스데반의 관용과 용서의 정신을 목격하였다. 그는 또한 그가 고문하고 고통을 준 많은 사람들이 보여 준 꿋꿋함과 그 모든 고통을 기쁘게 감내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어떤 이들이 그들의 신앙 때문에 기쁨으로 그들의 생명까지도 버리는 것을 보았다.
이 모든 일들로 사울은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라는 거의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이 그의 마음에 밀려왔다. 이럴 때마다 사울은 밤이 맞도록 이 확신과 싸웠고,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며 그의 제자들은 기만당한 광신자들이라는 자기의 신념을 공언함으로써 항상 문제를 해결하였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고 말씀하셨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라는 질문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당신을 당신의 백성과 동일시하고 계신다. 사울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함으로써 직접 하늘의 주를 공격한 것이었다. 사울은 그들을 대적하여 거짓되이 비난하고 증거함으로써 세상의 구주를 대적하여 거짓되이 비난하고 증거한 것이었다.
사울은 그에게 말씀하신 분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요,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속주이신 나사렛 예수이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울이 “떨고 놀라면서 주여 내가 어떻게 하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에 주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영광이 물러가고, 사울이 땅에서 일어났을 때에, 그는 자신이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육신의 눈에 너무나 강렬하였었으므로 그 빛이 사라지자 밤의 캄캄함이 그의 시야를 덮었다. 그는 이처럼 자기의 눈이 먼 것은 그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잔인하게 핍박한 데 대한 하나님의 형벌임을 믿었다. 깊은 흑암 중에 그가 이리저리 더듬거렸으므로 두려워하고 놀라는 그의 일행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그 사건이 일어난 날 아침, 사울은 대제사장이 그에게 준 신임장으로 인하여 자족하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그에게 중대한 책임이 놓여 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다메섹에서 새로운 신앙이 퍼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유대 종교의 이익을 도모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그의 사명을 성공리에 완수하고자 결심하였고, 그의 앞에 있으리라고 예상한 그 경험을 열렬한 기대감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성으로 들어갈 때에 그의 기대와는 얼마나 다른 일이 일어났는가? 눈멀고 무력하게 되어 고통을 당하고, 양심의 가책과 앞으로 그에게 어떠한 형벌이 임할지를 몰라 번민하던 사울은 제자 유다의 집을 찾아 그 곳에서 조용한 가운데 명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삼일 동안 사울은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 심령의 고통의 날들은 그에게는 마치 여러 해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거듭거듭 괴로운 심정으로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가 취했던 입장을 회상하였다. 그는 스데반의 얼굴이 하늘의 광휘로 빛났을 때까지도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악의와 편견에 지배를 받고 있던 자신의 죄를 두려움으로 생각하였다. 슬픔과 상심 가운데 그는 자신이 가장 뚜렷한 증거들에 대하여 여러번 눈과 귀를 닫았으며 나사렛 예수를 믿는 신자들을 잔인하게 핍박하도록 강요했던 일을 회상하였다.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마음을 겸비케 하는 날들을 외로이 떨어진 곳에서 보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오는 목적에 대하여 경고를 받은 신자들은 그가 그들을 더욱 쉽사리 속이기 위하여 연극을 꾸미고 있는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멀리하여 동정하기를 거절하였다. 사울은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연합하려고 계획했던 회개하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호소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 까닭이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인간의 동정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유일한 도움의 희망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있었으므로 그는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홀로 하나님과 함께 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많은 성경 말씀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확신으로써 예리해진 기억력을 가지고 사울은 그 예언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이 살피며 내려왔다. 사울이 이 예언들의 뜻을 깊이 생각할 때에 약속된 메시야이신 예수를 거절하게 한 과거 그 자신의 이해력의 무지와 일반 유대인들의 맹목에 놀랐다. 이제 그의 밝아진 시야에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과거 그가 가졌던 편견과 불신으로 인해 그의 영적인 이해력이 흐리게 되어 나사렛 예수에게서 예언의 메시야를 분별하지 못하게 한 것을 알았다.
시편 제 30 편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사도행전 제 9 장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쫓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시편 제 30 편 SDA 성경주석
서론. 시 30편은 심각한 질병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큰 위험에서 회복된 것을 경축하는 감사의 시이다.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라는 표제에서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시 30편은 다윗이 그의 궁전 낙성식을 위해 지은 시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온역이 발생한 후에 미래의 성전터인,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봉헌하는 일을 위해 지어진 시일 가능성도 있다(대상 21:14~22:1). 이 시는 명백히 개인적인 시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그분께 깊은 감사를 나타내고 그가 질병에 걸려 있는 동안 자신이 경험한 바를 상세히 기술한다. 오늘날에는 수전절(하눅카[H.anukkah])에 이 시가 낭독되고 있다.
표제에 대해서는 67, 78, 79쪽을 참조하라.
1. 높일 것은. 생각과 애정의 최우선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함.
나를 끌어 내사. 히브리어 딜리타니(dilli-tani). 달라(dalah)라는 어근에서 유래된 단어로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임(참조 출 2:16, 19). 시인은 2절과 3절에 언급되어 있는 위험들에서 자신을 끌어올려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2. 부르짖으매. 8~10절에 그가 부르짖은 내용이 나온다.
고치셨나이다. 이 말은 은유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일 수도 있다(참조 시 41:4). 하지만 여기서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 둘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 다윗은 재앙이 임한 때에 그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바라보면서 비탄에 빠졌던 것 같다(참조 삼하 24:13~17; 시 30편 서론).
3. 내 영혼을. 즉 “나를”(참조 시 16:10 주석).
음부. 셔올(s∨e’ol). 죽은 자들의 상징적 거처(참조 잠 15:11 주석). 시인의 병이 너무나도 심각하여 그가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고 보는 것이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이다.
무덤. 참조 시 28:1 주석.
4. 성도들. 히브리어 하시딤(h.asidim). 참조 시 36편에 관한 추가적 설명.
찬송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을 때 우리는 그를 찬양하는 일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하기를 바라게 된다(참조 시 9:11; 34:3 주석).
이름. 곧 “기념물.”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품은 그가 사람들을 다루신 일을 회상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5. 잠깐이요. 범죄하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자비를 위해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노염은 매우 짧다(8~10절).
그 은총은. 하나님의 노염과는 달리 그의 은총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계속된다(참조 시 16:11).
기숙할지라도. 히브리어 린(lin), “밤을 지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저녁에는 울음이 밤을 지내기 위해 올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기쁨. 히브리어 린나(rinnah), “기쁨의 부르짖음.”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동사가 없이 단순히 “새벽에는 기쁨의 외침”이라고만 써서 아침에 갑작스럽게 맞는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열대 지방에서 태양이 박명(薄明)의 시간을 길게 갖지 않고 갑자기 지평선 위로 그 장려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빛도 슬픔의 어두움을 순식간에 몰아낸다(참조 사 26:20; 54:7, 8).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 슬픔의 밤은 언제나 기쁨의 아침에게 그 길을 양보할 것이다. 단어들이 다음과 같이 짝을 이루면서 대구법이 면밀히 유지되었다. “노염”과 “은총”, “잠간”과 “평생”, “저녁”과 “아침”, “울음”과 “기쁨.”
6. 내가 형통할 때에. 시인은 그의 현재 경험과 과거 경험을 서로 비교하며 그가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할 바로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고통과 고난을 주심으로 영구적인 안전이 오직 그분 안에만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하신다. 친구나 재산이나 건강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지 않고 그 같은 교훈을 배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요동치 아니하리라. 시인이 자신의 삶에서 한때 느꼈던 극단적 자기 확신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다.
7. 굳게 세우셨더니. 이 문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은혜로 나의 산을 위하여 요새(또는 세력)를 세우셨나이다”가 된다. 이 문장의 온전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시인이 크게 형통할 때 그에게 있던 자만심을 암시한 듯이 보인다. 그는 그 당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시인에게 자신에게 임한 질병 또는 위험은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졌음을 나타내는 표였다(참조 시 13:1 주석).
근심하였나이다. 히브리어 바할(bahal), “방해를 받다”, “놀라다.” 출 15:15; 삿 20:41; 삼상 28:21 등에서의 이 단어의 용도와 비교하라.
9.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9절과 10절은 시인이 드린 기도이다. 만일 시인이 죽는다면 그의 죽음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참조 6:5; 88:10~12; 사 38:18, 19) 이 같은 주장은 “시인이 어린아이와 같이 친밀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Oesterley). 이 같은 탄원은 전형적인 히브리식 탄원이다.
10.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그는 고난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그의 유일한 도움이 있음을 깨달아 배웠다.
11.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슬픔”과 “춤”, “베옷”과 “기쁨” 사이에 나타나 있는 뚜렷한 대조를 주목하라(참조 사 61:3).
춤. 기쁨의 증거. 어린아이들은 행복하고 감사할 때 거리낌 없이 즐겨 춤을 춘다(참조 출 15:20; 렘 31:4, 13; 삼하 6:14 주석).
베옷. 애도자의 복장(참조 욥 16:15; 사 3:24).
12. 영영히. 문자적으로 “오랫동안.” 즉 시인의 평생을 의미한다. 시인은 자기 삶의 모든 활동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자 결심한다. 그는 역경을 통해서 자신을 번영하는 삶을 살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교훈을 배웠다.
제 12 장 박해자에서 제자로*[본 장은 사도행전 9:1-18에 의거함]
이 모든 것은 박해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계시였던가! 이제 사울은 약속된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로서 이 땅에 오셨으며, 그분은 자신이 구원하려 했던 사람들에게서 거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는 또한 구주께서 무덤에서 의기 양양하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도 알았다. 거룩한 계시가 임한 그 순간, 사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구주를 증거한 스데반이 그의 동의로 희생되었고, 그 후 그로 인해 다른 많은 훌륭한 예수의 제자들이 잔인한 박해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것을 두려움으로 기억하였다.
구주께서는 스데반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씀하셨고 그의 명료한 논리를 논박할 수가 없었다. 그 유식한 유대인은 순교자의 얼굴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반사되어 마치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행 6:15)은 것을 보았다. 사울은 원수들에 대한 스데반의 관용과 용서의 정신을 목격하였다. 그는 또한 그가 고문하고 고통을 준 많은 사람들이 보여 준 꿋꿋함과 그 모든 고통을 기쁘게 감내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어떤 이들이 그들의 신앙 때문에 기쁨으로 그들의 생명까지도 버리는 것을 보았다.
이 모든 일들로 사울은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예수께서 약속된 메시야라는 거의 부인할 수 없는 확신이 그의 마음에 밀려왔다. 이럴 때마다 사울은 밤이 맞도록 이 확신과 싸웠고,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며 그의 제자들은 기만당한 광신자들이라는 자기의 신념을 공언함으로써 항상 문제를 해결하였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고 말씀하셨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라는 질문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당신을 당신의 백성과 동일시하고 계신다. 사울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함으로써 직접 하늘의 주를 공격한 것이었다. 사울은 그들을 대적하여 거짓되이 비난하고 증거함으로써 세상의 구주를 대적하여 거짓되이 비난하고 증거한 것이었다.
사울은 그에게 말씀하신 분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야요,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속주이신 나사렛 예수이심을 의심하지 않았다. 사울이 “떨고 놀라면서 주여 내가 어떻게 하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에 주께서는 그에게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영광이 물러가고, 사울이 땅에서 일어났을 때에, 그는 자신이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알았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육신의 눈에 너무나 강렬하였었으므로 그 빛이 사라지자 밤의 캄캄함이 그의 시야를 덮었다. 그는 이처럼 자기의 눈이 먼 것은 그가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잔인하게 핍박한 데 대한 하나님의 형벌임을 믿었다. 깊은 흑암 중에 그가 이리저리 더듬거렸으므로 두려워하고 놀라는 그의 일행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갔다.
그 사건이 일어난 날 아침, 사울은 대제사장이 그에게 준 신임장으로 인하여 자족하면서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 그에게 중대한 책임이 놓여 있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다메섹에서 새로운 신앙이 퍼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유대 종교의 이익을 도모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그의 사명을 성공리에 완수하고자 결심하였고, 그의 앞에 있으리라고 예상한 그 경험을 열렬한 기대감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성으로 들어갈 때에 그의 기대와는 얼마나 다른 일이 일어났는가? 눈멀고 무력하게 되어 고통을 당하고, 양심의 가책과 앞으로 그에게 어떠한 형벌이 임할지를 몰라 번민하던 사울은 제자 유다의 집을 찾아 그 곳에서 조용한 가운데 명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삼일 동안 사울은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이 심령의 고통의 날들은 그에게는 마치 여러 해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거듭거듭 괴로운 심정으로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가 취했던 입장을 회상하였다. 그는 스데반의 얼굴이 하늘의 광휘로 빛났을 때까지도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악의와 편견에 지배를 받고 있던 자신의 죄를 두려움으로 생각하였다. 슬픔과 상심 가운데 그는 자신이 가장 뚜렷한 증거들에 대하여 여러번 눈과 귀를 닫았으며 나사렛 예수를 믿는 신자들을 잔인하게 핍박하도록 강요했던 일을 회상하였다.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마음을 겸비케 하는 날들을 외로이 떨어진 곳에서 보냈다. 사울이 다메섹으로 오는 목적에 대하여 경고를 받은 신자들은 그가 그들을 더욱 쉽사리 속이기 위하여 연극을 꾸미고 있는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를 멀리하여 동정하기를 거절하였다. 사울은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연합하려고 계획했던 회개하지 않은 유대인들에게 호소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는 그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고조차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 까닭이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인간의 동정에서 제외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유일한 도움의 희망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에게 있었으므로 그는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홀로 하나님과 함께 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그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많은 성경 말씀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확신으로써 예리해진 기억력을 가지고 사울은 그 예언들을 하나하나 주의 깊이 살피며 내려왔다. 사울이 이 예언들의 뜻을 깊이 생각할 때에 약속된 메시야이신 예수를 거절하게 한 과거 그 자신의 이해력의 무지와 일반 유대인들의 맹목에 놀랐다. 이제 그의 밝아진 시야에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과거 그가 가졌던 편견과 불신으로 인해 그의 영적인 이해력이 흐리게 되어 나사렛 예수에게서 예언의 메시야를 분별하지 못하게 한 것을 알았다.
시편 제 30 편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
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내사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3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음부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않게 하셨나이다
4 주의 성도들아 여호와를 찬송하며 그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5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6 내가 형통할 때에 말하기를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7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9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10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사도행전 제 9 장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쫓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시편 제 30 편 SDA 성경주석
서론. 시 30편은 심각한 질병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큰 위험에서 회복된 것을 경축하는 감사의 시이다. “다윗의 시 곧 성전 낙성가”라는 표제에서 용어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시 30편은 다윗이 그의 궁전 낙성식을 위해 지은 시일 가능성이 있다. 혹은 온역이 발생한 후에 미래의 성전터인,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제단을 봉헌하는 일을 위해 지어진 시일 가능성도 있다(대상 21:14~22:1). 이 시는 명백히 개인적인 시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하여 그분께 깊은 감사를 나타내고 그가 질병에 걸려 있는 동안 자신이 경험한 바를 상세히 기술한다. 오늘날에는 수전절(하눅카[H.anukkah])에 이 시가 낭독되고 있다.
표제에 대해서는 67, 78, 79쪽을 참조하라.
1. 높일 것은. 생각과 애정의 최우선 대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함.
나를 끌어 내사. 히브리어 딜리타니(dilli-tani). 달라(dalah)라는 어근에서 유래된 단어로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임(참조 출 2:16, 19). 시인은 2절과 3절에 언급되어 있는 위험들에서 자신을 끌어올려 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2. 부르짖으매. 8~10절에 그가 부르짖은 내용이 나온다.
고치셨나이다. 이 말은 은유적으로 정신적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일 수도 있다(참조 시 41:4). 하지만 여기서는 정신적 고통과 육체적 고통 둘 모두를 포함할 수 있다. 다윗은 재앙이 임한 때에 그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바라보면서 비탄에 빠졌던 것 같다(참조 삼하 24:13~17; 시 30편 서론).
3. 내 영혼을. 즉 “나를”(참조 시 16:10 주석).
음부. 셔올(s∨e’ol). 죽은 자들의 상징적 거처(참조 잠 15:11 주석). 시인의 병이 너무나도 심각하여 그가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고 보는 것이 이 구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이다.
무덤. 참조 시 28:1 주석.
4. 성도들. 히브리어 하시딤(h.asidim). 참조 시 36편에 관한 추가적 설명.
찬송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을 때 우리는 그를 찬양하는 일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하기를 바라게 된다(참조 시 9:11; 34:3 주석).
이름. 곧 “기념물.” 하나님의 이름이나 성품은 그가 사람들을 다루신 일을 회상하는 데에서 드러난다.
5. 잠깐이요. 범죄하고, 회개하고, 고백하고, 자비를 위해 기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노염은 매우 짧다(8~10절).
그 은총은. 하나님의 노염과는 달리 그의 은총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계속된다(참조 시 16:11).
기숙할지라도. 히브리어 린(lin), “밤을 지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본문은 “저녁에는 울음이 밤을 지내기 위해 올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기쁨. 히브리어 린나(rinnah), “기쁨의 부르짖음.”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동사가 없이 단순히 “새벽에는 기쁨의 외침”이라고만 써서 아침에 갑작스럽게 맞는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열대 지방에서 태양이 박명(薄明)의 시간을 길게 갖지 않고 갑자기 지평선 위로 그 장려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듯이, 하나님의 사랑의 빛도 슬픔의 어두움을 순식간에 몰아낸다(참조 사 26:20; 54:7, 8).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면 슬픔의 밤은 언제나 기쁨의 아침에게 그 길을 양보할 것이다. 단어들이 다음과 같이 짝을 이루면서 대구법이 면밀히 유지되었다. “노염”과 “은총”, “잠간”과 “평생”, “저녁”과 “아침”, “울음”과 “기쁨.”
6. 내가 형통할 때에. 시인은 그의 현재 경험과 과거 경험을 서로 비교하며 그가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할 바로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고통과 고난을 주심으로 영구적인 안전이 오직 그분 안에만 있음을 보여 주기도 하신다. 친구나 재산이나 건강을 잃어버리는 고통을 겪지 않고 그 같은 교훈을 배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요동치 아니하리라. 시인이 자신의 삶에서 한때 느꼈던 극단적 자기 확신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다.
7. 굳게 세우셨더니. 이 문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은혜로 나의 산을 위하여 요새(또는 세력)를 세우셨나이다”가 된다. 이 문장의 온전한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시인이 크게 형통할 때 그에게 있던 자만심을 암시한 듯이 보인다. 그는 그 당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시인에게 자신에게 임한 질병 또는 위험은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졌음을 나타내는 표였다(참조 시 13:1 주석).
근심하였나이다. 히브리어 바할(bahal), “방해를 받다”, “놀라다.” 출 15:15; 삿 20:41; 삼상 28:21 등에서의 이 단어의 용도와 비교하라.
9.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9절과 10절은 시인이 드린 기도이다. 만일 시인이 죽는다면 그의 죽음이 무한하신 하나님께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참조 6:5; 88:10~12; 사 38:18, 19) 이 같은 주장은 “시인이 어린아이와 같이 친밀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Oesterley). 이 같은 탄원은 전형적인 히브리식 탄원이다.
10.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그는 고난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그의 유일한 도움이 있음을 깨달아 배웠다.
11.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슬픔”과 “춤”, “베옷”과 “기쁨” 사이에 나타나 있는 뚜렷한 대조를 주목하라(참조 사 61:3).
춤. 기쁨의 증거. 어린아이들은 행복하고 감사할 때 거리낌 없이 즐겨 춤을 춘다(참조 출 15:20; 렘 31:4, 13; 삼하 6:14 주석).
베옷. 애도자의 복장(참조 욥 16:15; 사 3:24).
12. 영영히. 문자적으로 “오랫동안.” 즉 시인의 평생을 의미한다. 시인은 자기 삶의 모든 활동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자 결심한다. 그는 역경을 통해서 자신을 번영하는 삶을 살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교훈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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